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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다이어리

제목 2018년 9월 8일 서울 답사를 다녀 와서 1
작성자 최** 작성일 2018-09-12 14:16:04


서울 답사를 다녀와서 2.

 

 경성 호국 신사 터·‘108 하늘 계단’에서 시작 된 답사는 카마쿠라 보육원 터를 지나 김상옥 의사 항거 터에 이르렀다. 

 

 김상옥은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김상옥의  항거 터 즉 일본 순사 사살 지는 현재 후암동 304번지이다. 

 

현재의 김상옥 항거 터

 

 10대 중반에 기독교에 입문하고 서울 동대문감리교회를 다녔던 김상옥, 민족을 사랑했던 독립 운동가이자 기독교인이었다. 

 

  김상옥 항거 터에 이어 방문한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 사택 지는 일제 시기 삼판 통으로 통용되었던 곳으로 1920년 12월 조선은행의 대규모 사택지로 조성 되었고, 인근에 지금도 한국은행 직원 공동 숙소인 후암 생활관이 남아 있다. 

 

이 주변이 조선 은행 사택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력한 증거에 대해 김 란기는 “서울 골목길 탐방”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 한 바 있다. 

 

 “후암동에 한국은행 직원합숙소(생활관)란 곳이 있다. 현 후암동 주민 센터 인근이다. 왜 뜬금없이 한국은행 합숙소가 있을까? 대한제국 말기에 새로운 근대식 금융기관으로 설립돼 내려온 것이 지금의 한국은행이 아닌가! 일본계 금융기관이 경제를 지배하던 대한제국 말기에 국책은행 기능(국고 수납, 은행권 발행)을 하던 은행으로, 1912년 개업한 조선은행은 후암동에 직원 사택 지를 만들었다.  

 

이 조선은행이 남대문로에 처음 건축 공사를 시작할 때는 ‘일본 제일 은행 경성 총 지점’(1907년 11월)이었으나, 2년 뒤 한국 정부의 중앙은행으로 ‘한국은행’의 설립이 고시되었고(1909년 7월26일), 한일병탄 뒤에는 식민지 ‘조선은행’이 된 것이다(1912년 1월20일). 그 과정에 지은 이 사택들은 해방 뒤에는 상당 부분이 일반에게 팔려버렸고 나머지 땅에 들어선 게 한국은행 생활관이다. 팔려버린 사택지의 주택들은 이미 빌라 등 현대식 집합주택으로 변신했는데, 여전히 건재한 한국은행 생활관은 주변에 비해 제법 호사스럽게 보인다.”


출처 : 남산 자락 옛 동네엔 일본식 고급주택 흔적이 남아 근대 신주택지 후암동의 100년 (상) 한겨레, 201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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