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내용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서브메뉴 바로가기
바로가기
맨위로 이동
Home > 고객센터 > 후기 다이어리

후기 다이어리

제목 존 로스 선교 여정을 다녀와서
작성자 조동주 작성일 2017-09-14 14:28:30

출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제119호 (2017년9월2일 발행)에서 옮겨왔음을 밝힙니다.

 

존 로스의 선교 행적을 따라 동북 3성을 가다답사기

기억과 역사속의 일들을 찾아 나서다

 

 

 

김정옥(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 기념교회 권사)

 

2년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이수정 마가복음 130주년 일본방문 소식을 들었다. 적극적 참여자도 아니었지만 동행케 되었고, 마지막 피드백이 있던 날 중국에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던 바람이 바람결에 들려와 낯선 동행자들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

 

심양 도착. 오래전 목도했던 도시가 아니었다. 거대도시에 아파트군, 역동적 발전과 움직임, 교통으로 대변되는 공감할 수 없는 무질서, 화장실로 나타나는 다른 문화, 왜 그리 목소리가 커졌는지 알 것도 같다. 어떤 부분에서 우리가 겪었던 과정을 겪는 나라. 중국의 단면을 엿봤다.

 

그것도 잠시 심양의 동관교회와 문광서원을 방문했다. 기억과 역사 속의 사문서처럼 이정표로 있던 일들과 장소들이 살아서 일어난다. 난 역사학자도 아니고 학도도 아니다. 단지 신앙인으로 성경과 그 언저리를 알아야 해서 읽고 들었던 일 중에 존 로스가 있었고 이수정이 있었다.

 

존 로스가 사역했던 교회, 책에서나 보고 말로만 듣던 동관교회와 그 옆에 역사적인 문광서원, 최초로 한글성경이 번역되고 인쇄된 곳이라고 한다. ‘조선에 선교사가 들어가기도 전에 번역된 성경이 먼저 들어갔대, 세계에 유례가 없다네, 성경이 선교사보다 먼저 들어가서 교회가 그리 빨리 성장했다네, 경제성장도 빠르고 선교사도 그렇게 많이 파견하게 되었대.’ 어쩌면 그동안 우리 사회에선 기독교인인 것이 자부심 아닌 자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점까지는, 여기가 그 역사의 현장이구나.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성경번역을 인도해 주십사 매일 기도하며 우리 위해 울부짖은 그 선교사의 피땀이 흘렀던 곳이구나. “루터의 성경번역이 독일을 깨우듯 한글성경이 한국의 영성과 민족성을 깨웠다는 설명을 가슴에 담는다. 아직도 그 감성이 얼떨떨한데 서둘러 다음 행선지로 나섰다. , 동관교회는 주일 5부 예배를 드리며 예배인원이 30,000명이고 초대교회 예배와 같다고 설명해 주셨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유배지 심양관 터, 현재는 하버드 유치원 자리란다. 질곡의 여러 역사 자리들을 둘러보며 우리의 역사가 참으로 아팠다.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병원들을 둘러보고, 집안으로 이동하면서부터 버스 강의가 시작되었다. 일명 로드강의, 평균주행 5-7시간이다.

 

집안 행 로드강의, 이만열 교수님으로 시작되었다. 동관교회와 문광서원, 존 로스의 사역과 성경번역으로 이어지는 집중강의, 존 로스가 이응찬을 만나며 한글과 성경번역에 집착(?)해 가면서.. (여기서 의문이 풀풀존 로스는 자신의 중국 사역에는 집중해 간 것일까왜 자신의 본연의 업무보다 옆 나라와 옆 나라 언어에 더 관심을 갖는 걸까?) 그 때 조선에서는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이 있었고, 대원군의 쇄국정책, 은둔의 나라 조선의 어두운 영적 현실이 조선선교에 더 마음 쓰게 하지 않았나 하는 배경설명을 주셨고, 집에 와서 박형신 교수의 논문을 통해 그 답을 더 자세히 읽게 되었다. 이후 박형신 교수, 이덕주 목사의 열정 강의가 이어졌다.

 

2일째, 집안에선 옛 고구려의 영화와 흔적을 돌아보았다. 이 넓은 만주벌판에서 그 기상을 떨쳐내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기개를 보고 들으면서는 어려서 들었던 백의민족, 침략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언제 어디서부터 왜곡 전달된 것일까, 역시 신라의 변명이겠지. 그 광활한 영토를 포기하고 안에서만 왕 노릇하려니. , 왜 우리는 그 역사를 지켜내지 못하였을까? 주어진 밥상을 왜 잘 물려받지도 못했을까? 마치 축구에서 보듯이 어렵게 얻고 쉽게 내준 것은 아닐까? 고구려의 역사현장을 잃은 것보다 그 기개를 잊어버리고 마치 전설처럼 들려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 시절의 격변하던 주변 정세에서 왜 이제까지 못 지켜왔느냐가 아니라 좀 유지라도 됐었다면, 전체를 보는 안목보다 역시 안에서 집안싸움에 나라를 내준 꼴이 아니었나하는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는 속상함이, 20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대한민국의 한 소시민이 느끼는 생각 한 자락이다. 그런데 우리, 지금도 지킬 것을 잘 지켜가고 있는 것일까? 이 역시 2000여 년 후에 후손들이 보는 시점에서.

 

다음으로 이양자교회 터를 방문했다. 조선의 어지러운 정세, 식자공 김청송이 로스 선교사를 찾아왔을 때는 요즘말로 노숙자 모양이었단다. 그가 느리고 굼떴지만, 누가복음 식자를 끝내고 청해서 세례를 받은 후에 매서인으로 이양자 골짜기에 들어가서 전도하고 그 후 그곳에 세워졌다는 이양자교회. 빵차(?)가 아니었다면 그 더운 무더위에, 그 골짜기까지 어떻게 들어갔을까, 아마도 이덕주 목사님의 열정에 우리는 짹소리도 못하고 따라나섰겠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사 빵차로 인해 우리는 은혜롭게 그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묵직한 돌에 새겨진 耶蘇敎 初立 1898 됴선인뿐이었지만, 그 현장에서 우리 모두는 먹먹한 마음에 누가 볼까봐 조심스레 눈물을 거두고들 계셨다. 이덕주 목사님이 이양자 교인을 대변하여 인사해 주시는 열정에 이어 유계순 전도사님의 기도에 우리 모두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더 숨을 곳 없는 그 골짜기까지 들어가셨는데 우리가 이제 여기에 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로 이양자교회를 꼽는 데 개개인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단동으로 이동이다. 이어지는 로드강의.

유관지 목사님, 호산장성, 일보과, 통군정 소개, 그리고 고려문, 고려문(책문, 변문진)의 위치에 대한 이덕주, 박형신 교수님의 날선 논쟁은 덤이다. 유 목사님께서는 평생을 북한선교에 헌신해 오셨고 최근에 위중하셨다가 회복하시어 이번 여행에 참석하셨단다, 말씀마다 감사하다 하시며, 북한지역을 소개하실 때마다 마치 내 동네 안내하시듯이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져 후학들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3일째, 단동에서는 선교사역의 현장인 선교사 터(덴마크 선교사 터 방문, 예배당, 병원, 학교, 고아원 등)를 둘러보고, 고구려의 옛터 박작성, 호산장성을 보고 들었다. 호산장성은 동북공정의 시작점이란다. 한걸음만 건너면 북한이라는 일보과, 얕은 개울과 철책 앞에서 가슴이 답답한 현실 앞에 선다. 옛 고구려 터를 더듬어보듯이 훗날에 그곳도 우리와 한 나라였노라고 말하려나. 제발 그런 일은 없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절박함이 우리 마음에서 일었다. 의주성읍에서 제일 높은 압록강에 자리 잡은 통군정을 보려고 몇 사람 빼고 그 높은 곳을 모두 오르셨다. 존경의 마음으로 박수를 보낸다. 산 밑에서 달고 시원한 수박으로 갈증을 풀게 해주신 장로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고려문-변문진 방문, 조선과의 국경자리였다는데 지금은 오로지 중국이다. 중국과 조선의 국경으로 7일 정도씩 시장이 열리고 물물교환이 이뤄졌었다, 현재도 시장의 기능이 있고, 버스터미널이 있고, 기차역이 있고 차량통행이 활발하다. (참고로 중국은 아직 사람보다 차가 우선인 듯하다. 인도로 차량이 다니는 것이 허용되고 사람이 알아서 먼저 피해야 한다. 처음에는 정말 이상했는데 며칠이 지나니 그저 그러려니 해졌다.)

고려문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그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 뙤약볕에 아무도 힘들다 하지 않고 걸으며 설명을 들었고 여긴가, 거긴가, 이건 무슨 내용이지 하는 것에 모두 함께 들여다보며 아는가, 모르는가. 중요한 것은 중국 사람도 중국 한자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옛글자는 옛것이라서, 외국인은 변형된 한문자라서 다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명패에 적힌 내용들을 다 읽어내진 못했다.

 

버스로 이동 중에 연암 박지원이 서탑을 지나면서 그 광활한 대지에 울음을 터뜨렸다는 그 서탑을 보기 위해 공원 앞에 차를 세웠다. 설명을 들으면서 그런 마음을 가진 이가 어디 연암뿐이랴 싶었다. 소인배는 대륙을 처음보고 주어진 여건이 공평치 않음에 분노와 원통함을 느꼈던 기억을 떠올렸다. 서탑의 규모도 대단했지만 공원에서 중국인의 저녁운동시간이 장관이었다. 규모와 열정과 조직이 마치 말로만 듣던 인해전술이 어떠했으리라고 상상해 볼 정도였다.

 

요양으로 이동 중 로드강의, 이만열 교수님의 고대사 특강, 삼국시대와 중국의 발전, 백제와 고구려,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등장 고구려패권. 백제의 침공과 멸망. 6세기 신라의 융성, 당시 320년까지 중국의 발전, 위 촉 오, 수당의 싸움, 대조영 고구려 지배 유신, 돌궐과 연합 699-926년 발해까지... 아마도 이 때 쯤부터인가. 이 교수님께서 아이스크림을 사 주시며 강의를 진행하셨다.

박형신 교수는 동북공정에 대해 설명하시다가 동북공정이 안 되는 이유도 들어주었다. 봉신관계가 아니며, 연호의 사용문제가 있고,(중국과 독립연호사용, 중국의 지방정부 아니었다) 중국과의 국제전 살수대첩이 있다는 것. 흑룡성 주위 발해유적까지 중국에서 모두 훼손시키고 있지만, 지족이면 불욕이요 지지면 불태(知足不辱知止不殆).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덕주 교수의 강의는 로스와 조선 사람의 만남이 고려문에서 이뤄졌고, 후에 국경이라 불렸고 그 너머를 고려라고 했으며, 이후로 책문의 위치가 자꾸 이동하였다고 한다.

이 날 쯤에 N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독일 유학 후 캐나다에서 목회하시다 은퇴하시고 지금은 이곳에서 6개월 그곳에서 6개월을 지내시며 낮은 사람들,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신단다. 건네주신 젓가락과 젓가락 기도. 서로 겨누면 상대를 찌르는 무기가 되지만, 합하면 젓가락 한 벌이 되어 우리 삶에 아주 유용한 필수품이 된다고 하시며, 선물로 주신 젓가락은 그날이 이를 때까지 우리 모두의 숙제가 되었다.

 

4일째, 요양. 요양박물관을 방문하고, 요양 열방교회 방문. 김영철 목사님을 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회 파송 선교사였던 제임스 윌리암 선교사가 청나라 병사에 의해 구타당하여 죽자, 나라에서는 서둘러 가족에게 보상하였고 부모님이 기증해 주신 그 돈으로 몇 년 후인 1907년 요양기독교예배당을 세워 지금의 모양을 유지한다고, 정녕 한 알의 씨앗의 삶이다. 단단해 보이신 김 목사님, 목회자로 세우시기까지의 연단을 들었다.

요양 시병원과 스코틀랜드 선교지를 둘러보다. 지금은 대형병원이 세워졌고, 한쪽 구석에 쇄락해 쓰러져 가는 기념건물을 보며, 훗날 복원하려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려고.. 아쉬움에 마음이 찡하다. 쉽게 없애는 것이 아닌데. 우리도 그랬고, 많이 후회하고 있는 부분인데...

 

영구행 로드강의부터 이크... 메모가 없네... 음 서만철 교수님의 무령왕릉 세계유산등재 스토리를 들은 것이 이때쯤인가... 과학자가 무령왕릉을 과학으로 풀어서 세계유산에 등재하기까지..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 있는 기독교유적지를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일을 추진 중이라고 하시며 한국기독교역사학회에 협조를 요청하셨고 앞으로도 계속 요청 예정이라고 하신다. 역사학자도 성경학자도 아니신데 말이다. 청지기 역할을 잘하면 어느 분야에 있든지 다 사용하시나보다.

 

5일째, 영구. 몰구영, 우장이라고 부른다.

영구항은 존 로스가 이곳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온 개항장이다. 후에는 봉천, 지금의 심양에서 사역하였고, 영구기독교회는 스코틀랜드 출신 번즈가 영국장로회에서 파송, 중국에서 최초 순교자. 내부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교회 외부만 둘러보았다. 맥킨타이어,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란다. 영구외국인 묘지는 최초의 순교자 번즈, 젊은 새댁이며 아기엄마인 로스의 부인 스튜어트, 로스의 제부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묻힌 곳이다. 한국의 양화진이 되었을 뻔한 그 자리가 지금은 운동장이 되어버린 선교사들의 공동묘지, 훗날에 반드시 기념되어져야 할 역사의 자리다. 이 모든 곳은 영구고중학교 안에 있는 것으로 러시아공사관 터를 보겠다고 박형신 교수님이 관리인과 교섭(?)을 하여 방문이 허락되었다.

우리 일행은 서상륜, 백홍준 등이 세례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서서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우장으로 이동하여 선교사들이 다녔다는 매우 아름다운 태평교를 둘러보았다. 장이 설 때는 원근각지에서 교환할 물품을 가지고 많은 배가 모이기도 했었다고 한다.

 

심양 행 로드강의 특강은 이복규 교수, 유쾌한 웃음으로 좌중을 휘어잡으신 후, 윤동주의 서시에 대해, ‘서시는 그 책의 서문이다, 책의 서문으로 를 썼을 텐데, 서문 형식이 시 형식이어서 자연스럽게 조판과 교정에서 序詩로 바뀐 것이며, 초벌 원고에서 원고지 앞 단락이 본문과 다르게 작성되었음을 보셨노라고, 명 강의 후에 우린 모두 동의했다, ‘序文이었구나.

 

6일째. 심양 서탑교회, 오명복 목사 담임

중국을 주께로, 오해원 목사.

심양고궁 방문은 더위와 지침 때문에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 아. 이렇게 우리의 일정이 마감이 되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전에 이번 모임의 숨은 공신을 소개해 드려야겠다. 다른 분들도 계시겠지만 노출된 두 분에 대해. 그 분들의 간절한 사모함 때문에, 아니 우리 모두가 가졌던 사모하는 마음이 이런 훌륭한 답사를 이뤄낸 것은 아닐까? 김경희 집사. 출발하는 날 집 앞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삐끗, 발목의 통증보다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나님, 저 들것에 실려서라도 갈 거예요하며 약국을 찾았고, 압박 붕대로 싸매고 응급처방 후 우리와 합세하여 그 긴 일주일의 여정을 함께 했다. 유쾌하게, 때로는 걷고 때로는 질질 끌며, 작은 소리로 계속 기도하고 있어요. 제가 누가 되지 않도록이요하면서 아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한 주간쯤 지난 후 전화.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마세요. 저 병원에 있어요, 발목이 부러졌대요, 수술하고 적어도 2주 입원, 6주 깁스요. , 또 장애란 권사, 강권함에 의해 퇴임식까지 조정해 가며 바쁜 중에 중국행, 출발 전부터 발병한 후두염, 인후염이 에어컨과 강행군으로 점점 심해져 나중에는 기관지염과 축농증까지 확대되었다. 그 덕에 중국병원까지 들어가 보았노라고 했지만, 귀국 후에도 심하게 고생하고 있다. 이분들의 연약함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간절함과 사모함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풍성함으로 채워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려함이다!

 

노익장에도 불구하고 이만열 교수님, 유관지 목사님, 윤경로 장로님의 명 강의는 동영상 촬영이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었고, 다음 세대 이덕주 목사님, 박형신 교수님의 강의 역시 녹음이라도 했어야 했다. 특강의 서만철 교수님, 이복규 교수님, N 선생님, ** 목사님.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명 강의에 때로는 숙연해 하고 때로는 포복절도하며 피곤도 뒤로 한 채 어디서 그런 힘들이 나오시는지, 젊은(?) 우리는 앉아서 들으며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린 더 친밀해졌다. 참 강의하시는 강사가 아이스크림과 과일을 제공해야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진풍경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신지, 우리가 누렸던 로드강의의 특징인데, 종래에는 자신들의 분신과 같은 저작물을 우리에게 증정해 주셨다. 이복규 교수님, 변영우 선교사님 감사합니다.! 며칠만 더 지냈으면 아마 더한 것도 주셨으리라고 행복한 상상을 했었다. , 국민일보 박재찬 기자, 진행을 매우 적절하게 해주신 감초 조동주 상무, 가이드 주 서방까지 참 골고루 많은 분들이 헌신적으로 섬겨주셨다. 비박(박사가 아닌)들은 열렬한 호응으로 화답했으니 파이팅! 박사님들은 열심히 강의해 주셨으니 파이팅! 그리고 연구소의 안주인 되시는 이순자, 박혜진 박사님... 두 분의 수고의 결실에 우리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를 빌려 우리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대신 전한다. 꾸벅^^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여정

 

이춘재(1기 한국기독교문화유산해설사 양성과정 수료생)

 

한국기독교 문화유산 해설사 양성과정 강좌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기독교 유적지 답사에 참여하였다. 지난해 4월 서대문역에 모여 정동지역 답사를 시작하여 강화, 서천, 공주, 수원 등으로 이어진 답사에 계속 참여하면서 기독교 역사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제는 답사의 발길이 성경을 한글로 처음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의 활동 지역이었던 만주지역으로 간다고 하니 떠나기 전부터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사 여행의 시작은 존 로스가 세운 심양(沈陽) 동관교회의 방문이었다. 주일에는 5부 예배를 드리며 성도가 삼만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처음부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배당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도 않고 중국에 기독교가 널리 퍼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대상 뒤쪽의 커튼을 걷고 검은 비석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존 로스가 1915년 영국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관교회 성도들이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비석에 새겨 둔 것으로 강대상 뒤쪽에 잘 숨겨두어 의화단사건이나 홍위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예배당 옆에는 존 로스가 최초의 한글성경을 인쇄 출판하였던 문광서원 건물이 보존되어 있어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이 건물을 둘러보면서 김청송, 서상륜, 이응찬 등 한글성경을 번역 출판하던 최초의 수제자들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되어 감동스러웠다.

이어서 중국의과대학 부속 성경병원(盛京醫院)을 방문하여 이 병원을 개설한 듀걸드 크리스티 동상 앞에 모여 사진을 찍으려는데 갑자기 경비원들이 모여들어 우리 일행의 행동을 제지하였다. 사드 문제로 중국과의 관계가 미묘한 시기라 조심스러운 답사를 예고하는 듯하였다.

 

심양에서 집안(集安)으로 이동하는 장거리 버스여행은 첫날부터 강의실로 바뀌어 돌아오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박사님이 15명이나 되고 풍부한 경륜을 갖춘 목사님들까지 합하면 우리 일행 가운데는 명강사들이 넘쳐서 마이크를 잡으면 간식을 내야 한다는 규칙을 정해놓고 버스가 이동할 때마다 방문할 장소에 대해서 자세한 브리핑을 받거나 흥미로운 역사이야기, 신앙생활 등 여러 가지 강의를 듣게 되었다. 계속 이어지는 명사들의 강의에 귀 기울이며 감동을 받기도 하고 때론 피곤하여 조용히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으나 맛있는 간식을 먹으면 다음에는 누가 간식을 내게 될지 기다려지곤 했다.

 

길림성 집안현에서 빵차를 타고 첩첩산골 이양자 마을을 찾아갔다. 바위에 새겨진 耶蘇敎 初立 1898 됴선을 확인하는 순간 묵직한 감동이 밀려왔다. 만주로 피신하여 깊은 산속에 모여 살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한인들에게 김청송이 성경을 전하고 복음의 씨앗을 뿌려 외국 땅에서 최초의 한인교회가 깊은 골짜기 이양자 마을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양자교회 터 답사를 마치고 단동(丹東)을 향해 출발한지 4시간이 지났다. 압록강 건너편으로 북한의 산야가 보이고 그곳은 평안북도 의주라고 했다. 우리는 어렴풋이 보이는 산들 사이로 조선시대 서북방위의 거점이었던 통군정을 확인하느라고 법석을 떨면서 단동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알려진 호산장성에 올라 다시 통군정을 조망하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현실에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이어서 봉황산 아래 고려문을 찾아갔다. 청나라가 사람들의 출입을 막기 위하여 버드나무 가지를 꽂아 만든 울타리에 설치한 여러 곳의 변문 가운데 조선과 유일하게 통하는 변문을 고려문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고려문의 위치는 추측만 무성하고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우리가 방문한 마을이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지대로서 양국 사이의 교역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는 상가가 이어지고 뒤쪽으로는 주민들이 사는 마을로 1874년 존 로스는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하고 조선 상인들에게 설교를 하였는데 상인들의 관심은 오직 로스가 입고 있던 양복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스는 숙소로 찾아온 한 상인에게 한문성경을 주었는데 그가 최초의 세례교인인 백홍준의 부친이었다고 한다. 로스와 백홍준의 부친은 그날 무슨 대화를 나눴으며 백홍준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복음을 깨달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절로 솟아났다.

로스에게 한글을 가르쳐준 의주상인 이응찬을 처음 만난 곳도 고려문이고 세례를 받기 위해 로스를 찾아가는 최초의 수세자들도 이 마을을 지났으리라 생각하니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의 씨앗은 고려문 마을에 최초로 그 씨앗을 뿌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행은 생각지도 않은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오후 늦게 요양에 도착하여 일정에 없던 백탑을 방문하였는데 백탑공원의 진풍경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저녁 무렵 공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거나 운동, 산책 등을 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버스로 장거리 이동을 하면서 몸이 굳어버린 우리 일행도 무리에 끼어들어 춤을 추며 열심히 몸을 풀었다. 요양에서는 박물관 견학도 하고 시병원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의 흔적을 살펴보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지만 무엇보다도 조선족교회를 방문하여 우리 동포들이 중국근현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온 이야기와 김영철 목사님의 목회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는 가슴 뜨겁게 밀려오는 감동을 지울 수 없었다. 과연 나 자신은 복음을 위하여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인지 자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백홍준, 이응찬 등이 매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은 항구도시 영구(營口)를 방문하여 옛 세관건물과 푸시킨과 톨스토이 그리고 고리키의 흉상이 세워져 있는 구 러시아 영사관을 둘러보고 바로 옆에 깔끔하게 운동장이 잘 정비되어 있는 학교로 들어갔다. 이 지역은 과거에 외국 공관들이 몰려있었고 외국인 선교사 묘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만주지역 최초의 선교사였던 윌리암 번즈, 존 로스 선교사의 첫 부인으로 로스 목사와 결혼하고 그 해 영구에 도착하여 이듬해 아들을 낳고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난 로스의 첫 부인, 매킨타이어 선교사 등이 묻힌 외국인 묘지라고 하는데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행여 비석조각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두리번거렸지만 이국땅에서 복음을 전하다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기 어려운 곳이었다. 한국기독교역사를 살펴보면서 선교사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 특히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생명을 잃는 이야기를 많이 접했는데 만주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심양으로 돌아왔다. 1981년 중국내에서 자유화 물결을 타고 다시 교회 문을 열었다는 서탑 교회에서 이번 답사를 정리하는 마지막 예배를 보았다. 교회 내에서는 주말 결혼식이 진행되는 등 밝은 분위기였고 우리는 한글 간판이 유난히 많은 서탑가 거리를 걸으면서 북한 식당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북한 서점에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심양고궁을 방문하여 수많은 인파에 섞여 고궁을 둘러보면서 관광객으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이번 답사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번 존 로스 행적을 따라 떠난 답사여행은 많이 듣고 많이 보고 확인할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말하고 싶다. 압록강 건너편 북한의 산야를 자주 바라보면서 통일을 기원하고 분단 조국에 대한 아픈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순간들, 인도자 없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 깨달아서 세례를 받으러 영구까지 찾아가는 백홍준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고 말씀을 되새기며 묵상에 매진하겠다는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으로서 믿는 사람들의 반성이 필요하다며 기도의 제목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간증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어디쯤 있는 것 같은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오지현(1기 한국기독교문화유산해설사 양성과정 수료생)

 

 

이번 존 로스 동북3성 답사는 신청 마감 직전까지 고민한 끝에 어렵게 신청한 여행이었습니다. 일주일을 모두 비우려니 꽤 부담이 컸지만, 연구소에서도 강조하셨던 것처럼 존경하는 여러 교수님들과 함께 답사를 할 기회가 또 언제 있겠는가 싶어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존 로스 선교사님이나 중국 내 한국 선교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아직은 작년에 공부한 한국기독교 문화유산 해설사 양성과정에서 배운 내용을 소화하면서 국내에서 활동하신 선교사님들에 대해서 공부하기도 바빴습니다.

 

다른 기대보다는 동행하시는 교수님들에 대한 팬심으로 가게 된 답사 여행은 연구소의 다른 답사와 마찬가지로 일정이 빡빡했고, 내용이 매우 알찼습니다. 그리고 40명이 넘는 인원은 일주일 동안 질서정연하게 움직였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융통성이 있었고, 유쾌했습니다. 출발 당일 아침 6시에 인천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제가 실수로 지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다른 분들은 대부분 그 이른 시간을 맞추어 미리 도착해 계시는지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짝인 김집사님이 건강 문제로 버스 앞쪽에 앉으셔야 하는 상황이어서 감사하게도 저는 그 분과 함께 앞자리에 앉아 일정 내내 이어지는 교수님들의 즉석 강의를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답사에 참여하신 분들 중 박사 이상이 열다섯 분 이상이었지만 모두가 하나 같이 겸손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그것만으로도 큰 배움이 되었고 중간 중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선생님들의 깜짝 강의도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첫날 동관교회문광서원에서는 로스 선교사님에 대한 교인들의 깊은 감사와 존경을 느꼈고, 성경병원에서는 크리스티 선교사 동상 앞에서 중국 공안에게 쫓겨나면서 현 정세와 중국 공안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게다가 평소 자주 들고 다녔던 연구소에서 준 주황색 <이수정 마가복음 출판 130주년 기념> 천 가방을 별 생각 없이 들고 왔다가 기독교 관련 티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항에서 얼른 다른 천가방을 사서 바꿔 들고 다녔습니다. 왜냐 하면 그 가방에는 한자로 성경 쪽복음 이름이 쓰여 있는데 중국에서는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반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 기웃거리는 우리를 자꾸 힐끔 힐끔 보는데이렇게 공안의 불심 검문에 자주 걸리는 팀은 처음 경험해본다는 중국인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하마터면 여기에 화를 더할 뻔 했다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안도했고, 새삼 대한민국은 기독교인으로 살기에 참 편한 좋은 환경이구나 싶었습니다.

 

둘째 날 아침에 압록강에서 북한 땅 주변을 돌아 지나오면서 통일을 더욱 고대하는 마음을 가졌고, 광개토대왕릉과 광개토대왕비, 그리고 장수왕릉에서는 중국 동북공정과 우리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이양자교회 터에서는 그 깊은 골짜기의 삶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과정을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셋째 날은 작은 내 너머로 북한 방산마을과 주민들이 보이는 일보과에서 북한 쪽을 향해 기도하게 되었고, 호산장성 위에서 의주를 바라보며 로스 선교사님의 험한 여정을 생각했고, 고령에 인공 심장 박동기를 달고도 기어이 호산장성에 오르신 어느 목사님의 모습에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고려문에서는 몇 년 전까지도 살고 있었던 조선인들도 거의 떠났고 유적이라 할 만한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교수님들께서 기록과 기억을 토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서 예전 고려문의 위치와 그 당시 모습을 어느 정도 정리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29요양시병원에서는 쓰러져 가는 선교 관련 건물을 살펴보면서 안타까웠고, 조선족교회에 가서는 그분들의 진심어린 환대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아름다운 열매가 계속 맺히기를 기원했습니다.

 

30일에는 영구시 기독교회에서는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찬송을 함께 부르면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고, 근처 영구시외국인묘지 터를 찾았을 때는 몇 년간 안내봉사를 했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떠올리며 아쉬움과 감회에 잠시 젖었습니다.

 

이번 답사에서 또 특별했다고 생각하는 경험은, 확인할 필요가 있는 주제를 가지고 전문가들이 함께 그 장소에 가서 찾고 토론하는 것을 옆에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고려문의 원래 위치를 찾는 과정에서 역사학자들의 연구의 현장을 잠시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참 즐거웠습니다.

이만열 교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예수님 예수님 우리 구주 예수님>이라는 옛날 찬송가를 배우면서는 독립군가를 불러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양화진이라는 곳에서 기독교 역사를 접한 후 범위를 대한민국 전체로 넓혔다가 이제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쪽 복음서를 들고 제물포에 상륙하기 이전 중국에서 복음 전파와 한글성경 번역이 이루어지는 때로 시기도 앞당기고 중국까지 범위를 넓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다만 가뜩이나 학습능력이 부족한데 공부해야 하는 분량도 많아져서 부담도 큽니다.

 

이번 답사를 준비하신 연구소 선생님들의 헌신과 진정성에서 감동을 받았고, 방문지를 설명해주시고 안내해 주신 여러 교수님들과 통역과 현지 가이드를 해 주신 목사님의 열정과 노력에도 놀라고 감사했습니다. 한 번의 답사에서 이렇게 많은 배움과 감격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중국 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온 복음을 우리가 다시 중국에 전하게 되는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많이 느꼈습니다. 추위를 이기고 새싹을 틔우는 봄 같은 이양자교회와 잎이 무성한 여름 같은 요양 조선족교회 그리고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어디쯤 있는 것 같은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자신의 자리(계절)에 맞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로그인을 하셔야 작성이 가능합니다.